MOTHER 현실도피



MOTHER (FC 1989, GBA 2003)

내가 이 시리즈에 대해 처음 듣게 된 건 북미판 Earthbound를 통해서였다. 레트로 게임을 다루는 유투브 채널들에서 SFC(SNES) 명작으로 자주 언급되길래 흥미가 생겨서 마더 2를 플레이하다가... 1/3정도 진행했을 때 세이브를 잃어버렸다. lol 알잖아. 세이브가 날아가면 다시 처음부터 할 의욕이 꺾이는 거.

그래서 한참을 놔두고 있다가, 재도전 하는 김에 1편부터 플레이해보기로 했다. SFC를 먼저 플레이하고 패미컴으로 역주행하면 불만족스러운 점이 더 많을 거라는 생각이었는데... 결국 나는 이 게임을 끝내는 데 1년 3개월이 걸렸다. ...1년 이상, 최종장인 홀리롤리 산 앞에서 의욕을 잃고 방치했거든.

아, 아무리 레트로 게임이라지만 마더의 엔딩을 네타바레 할 수는 없으니 엔딩 스샷은 없다.

일단 다른 것보다 먼저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난이도와 밸런싱. 제작진이 어린아이가 세상에 나가면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걸 게임에서 대변하고 싶었다...라는 발언을 했다지만, 창작자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다른 예술장르에서도 독자/청중/관객의 해석이 창작자가 본래 무엇을 의도했는지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하고, 게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집 문밖으로 나가자 마자 생사의 위기에 빠지는 주인공. 그리고 그걸 넘어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하자마자 전멸당하길 반복하는 주인공 파티. 특히 스노우맨 일대나 홀리롤리 산의 난이도 상승곡선은 굉장히 가파르다. 동료가 처음 들어왔을 때 레벨 1로 시작하는 것 역시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레벨 1 파티로 스노우맨의 그리즐리와 늑대무리를 돌파하고 아나를 동료로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초반에 동료가 다 갖춰지는 것도 아니고, 한참 중반 이상 접어들었는데 1레벨 동료가 들어오면 마지칸트로 돌아가 노가다 하라는 뜻으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내가 1년 전에 게임을 집어던지게 된 건, 테디의 파워에 의존해 간신히 홀리롤리산 입구 동굴을 돌파하고 중간지점에 다다르자마자 이벤트가 발생해 테디가 이탈되고 동굴을 처음부터 다시 돌파해야 하는 시점에서였다. 그 순간 느껴졌던 딥빡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일단 말해두자면 나는 전투를 반복해야 하는 노가다성 게임 자체에 불만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던전에서 헤메고 싸우는 것 자체가 게임의 목적인 던전 크롤러라고 하자. 이런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한 층 한 층 단위로 게임의 진행을 체감한다. 즉 이번 층에서 노가다를 하는 것은 다음 층의 공략의 일부이며, (노가다 정도가 어지간히 지나치지 않는 한) 캐릭터들이 강해지고 준비가 갖춰지는 것을 보며 게임이 진행되고 있다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스토리가 들어간다면 어떨까? 몇몇 조건을 만족시킬 때마다 이벤트가 발생하고, 그렇게 해서 스토리가 진행되는 게임, 즉 마더를 포함한 대부분의 RPG에서 플레이어는 게임의 진행을 레벨이나 던전이 아니라 이벤트 발생으로 체감하게 된다. 특히 JRPG의 메뉴 방식 전투는 솔직히 아무리 잘 만들어도 그 자체로 재미있는 방식은 아니잖아? 플레이어는 전투를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다음 이벤트를 보기 위해 필드 이동, 던전, 전투 등을 감수하는 것이고, 스토리 이벤트들 사이의 간격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즉 레벨 노가다가 요구될수록 플레이어는 게임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고 인식하게 되는 것. 이건 어디까지나 내 사견일 뿐이지만, 노가다를 하면서도 재미있는 게임과 노가다가 지겨운 게임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제작진의 의도가 전혀 전달되지 않은 건 아니다. 스노우맨, 로즈마리의 유령저택, 홀리롤리 산 등 맞서 싸우기보다 도망치는 걸로 돌파하는 게 나은 선택지인 경우가 많고, 정말 얘들이 약자라는 것, 어린애라는 걸 체감하게 된다. 주인공과 아나가 라이프업π를 습득한 레벨이라면 기그를 상대할 수 있으니 열심히 도망다니면서 보스를 찾자.

..참고로 나는 공략을 보지 않고 어거지자력으로 진행했다가, 마지막에 감동과 함께 허탈함이 밀려왔다. 응, 그 광고카피 그대로, 엔딩까지 울면 안돼(エンディングまで泣くんじゃない). 하지만 엔딩에서 울게 되는 건 절반은 그 고생이 다 뭐였는가라는 허무감 때문이야.



난이도/밸런싱 문제는 이쯤하고, 스토리로 넘어가면 사실 별거 없다. 오픈 월드를 돌아다니면서 NPC들과의 대화로 힌트를 모으고, 8개의 멜로디를 찾아 노래를 완성하고, 보스에게 향하면 되는 심플한 구성이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보게 되는 이벤트들은 지금 봐도 놀라운 것들이 많다. 이 놀랍다는 게 충격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중간에 유령저택 같은 부분을 보면 정말 호러 분위기 나는 연출도 있지만, 마더의 진정한 장점은 현대 배경이라는 점을 이용해, 생각해 보면 사소하고 일상적인 사건을 게임의 이벤트로 승화시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열차. 게임으로서 생각하면 열차는 단순히 이동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거기에 굳이 빠른 스크롤링과 터널 애니메이션을 붙여가며 연출을 넣었다. 어린이인 주인공들은 (대사는 없지만)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창밖으로 보며, 플레이어는 현실에서는 익숙하지만 게임에서, 특히 패미컴 게임에선 보기 힘든 연출을 보며, 함께 감탄하는 것이다. 땡스기빙에서 레인디어까지 가는 데 1분 가까이, 할로윈이나 스노우맨까지 가는데는 더 걸린다는 걸 생각하면 이게 짜증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건 대단하다. 다른 게임에서 돈 내고 바로 옆마을로 워프하는데 어설픈 연출에 1분이 걸린다면 어땠을까. 단순한 워프 기능을 게임 전체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 중 하나로 만든 이토이의 센스가 느껴진다.

던칸 공장이나 홀리롤리 산 등 웬만하면 지도를 보고 따라가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운 던전도 있지만, 이벤트 진행은 NPC들의 힌트만 잘 체크해도 충분한 진행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자기완결적인 작품인 것도 큰 장점이다. (물론 펜과 메모지를 곁에 두자. 그리고 힌트가 주어진다는 게 찾기 쉽다는 건 아니니 체크는 꼼꼼히.)

굳이 불만점이라면 2가지. 처음 시작하면서 멜로디 하나를 습득하고, 8개의 멜로디를 모아야 한다는 건 플레이어에겐 전달되지만 게임 내에서는 그 당위성이 약하다. 집에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발생했는데, 어쨌건 다짜고짜 모험을 나가라는 급전개. 아무리 용량이 부족했어도 그렇지, 여기에 대해선 좀 동기부여를 강화해 줬어도 좋지 않을까. 멜로디를 모으라고 확실히 말해주는 건 마지칸트의 퀸 메리를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증조부의 일기에 내용을 좀 늘려줬다면 괜찮았을 텐데.

다른 하나는 최종보스인 기그. 멜로디를 완성하고 게임 최종반까지 가야 그의 이름을 간신히 들을 수 있다. (난 멜로디를 완성해 마지칸트에 돌아가기 전까지 기그가 보스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2편 보스인 걸로만 알고 있었지..) 주인공의 집에서 발생한 폴터가이스트 현상, 동물원의 동물들의 폭주, 이스터 마을의 사라진 어른들, 이러한 괴사건들을 추적해 나가며 최종흑막까지 다다르는 과정은 스탠다드하지만 이 사건들을 하나로 엮을 만한 힌트도 없고, 공통된 흑막이 있긴 한지 조차 게임 내에서는 알 수 없고, 멜로디를 모으는 과정이 미스테리 해결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도 알 수 없다. 게임이니까 NPC들의 힌트에 따라 움직이며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면서도 게임 외적으로 이걸 왜 하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면서 몰입도가 살짝 깨진다. 그나마 북미판 엔딩이 들어간 GBA는 엔딩까지 가면 어느 정도 스토리가 회수가 되지만, 패미컴 원작은 그나마도 없었으니...



노스탈지아 없이 이 게임을 요즘 한다면? 애매하다. 마더는 게임을 끝낸 뒤에도 오랬동안 인상에 남을 명장면들이 가득한 게임이지만, 그 도중에는 지겨운 노가다의 길이 펼쳐져 있다. 다만 해결법이 있는데 양덕후들이 제작한 NES판 Earthbound Zero의 이지모드 패치가 있는데, 영문판이라도 좋다면 선택해 볼 만 하다. 경험치와 돈 입수가 2배가 되기 때문에 노가다의 필요성이 확 줄어든다.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이걸로 플레이했을텐데, 이 글 작성하면서 몇 가지 팩트체킹을 위해 검색하다가 발견했다. 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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