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토풀 보이프렌드 현실도피


はーとふる彼氏〜希望の学園と白い翼〜 / Hatoful Boyfriend (2011, 2014)

통칭 비연시. 제목에 몇 겹의 말장난이 들어가 있어 뭐라고 딱 꼬집어 번역하기도 그렇고, 구글링을 해 보니 영문판을 음차한 '하토풀 보이프렌드'가 가장 널리 통하는 거 같아 이걸로 제목을 달았다. 2014년 HD 리마스터 스팀발매 버전. 얼마 전에 세일했다.

첫눈엔 바카게로 보이지만 생각보다 그렇지만도 않다. 게임 내 세계관의 진상이 드러나는 BBL 루트까지 가지 않더라도 주의 깊은 플레이어라면 뭔가 이상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인 게, 이 게임의 조류들은 자기들이 인류의 문명을 이어받고 있다는 걸 자각하는 대사를 하며, 여름방학에 주인공 히요코가 그냥 찌뿌드하여 마라톤에 나서면서 지나치는 배경 중엔 명백히 파괴된 고층빌딩이 섞여 있고, 새들이 주택에 거주하는 반면 히요코는 무려 수렵민족(..)이라 동굴에 거주한다. 인류가 어떤 이유인가로 쇠락하고 그 자리를 비둘기들이 차지했다는 설정, 이말년씨리즈의 어느 편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우연이겠지만.

사실 플레이에 들어가면 남캐가 전부 조류라는 것만 제외하면 전혀 특기할 게 없는 평범한 오토메 게임. 사실 남캐만이 아니라 등장하는 인간 캐릭터가 주인공밖에 없다. 첫 캐릭터 소개 장면에서는 의인화 버전을 옵션으로 볼 지 선택할 수 있지만 게임 내에서의 스프라이트는 전부 조류 그대로이다. 리메이크까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벤트 CG같은 것도 없으며, 플레이 타임도 시작해서 엔딩까지 스킵 없이 전부 읽으며 진행하는 1회차에서도 2-3시간 정도면 끝날 정도로 짧다. 2-3회차 이상 들어가게 되면 겹치는 부분들을 스킵으로 넘겨버리며 더 짧아지고, 각 엔딩별로 스팀 업적이 걸려 있으니 뭔가 놓치거나 할 일도 없다.

시스템적으로 백로그를 확인할 방법이 없고, 스킵을 하면 읽은 부분만 스킵되는 게 아니라 죽 넘어가버리며, 때로는 세이브 파일을 읽어오지 못하는 사태도 생기는 등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어쩌다 한번 있는 일이긴 하지만 걱정된다면 세이브는 2개씩 하자. 언어설정을 여러 가지 지원하긴 하는데, 그 번역의 퀄리티는 좀 들쭉날쭉, 일본어 특유의 개그나 일본 서브컬쳐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패러디 개그들이 종종 희생되긴 하는데 이건 어쩔 수 없다. 



공통루트와 캐릭터 루트가 명백히 구분되어 있지 않고 진행 전반에 걸쳐 주요 선택지가 분기되는 초기 비쥬얼노벨에 많이 사용된 방식을 따르고 있다. 보통 이런 스타일이면 공략이 더 어려워지는 편인데, 다행히 분량도 짧으면서 그 공략에 필요한 플래그도 알기 쉬운 편. 일부 캐릭터는 노멀 엔딩과 풀 엔딩이 갈리는데, 다른 루트에선 별 의미없는 패러미터를 얼마나 올렸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도중 수업내용을 선택하면서 한 가지만 집중적으로 올리면 거기에 해당하는 사쿠야, 오코상, 슈 엔딩의 완전판을 볼 수 있지만 그 정도. 사실 이것도 플레이 시간을 잡아늘리기 위한 의도로 보이지만..

캐릭터는 다소 아쉽다. 소꿉친구, 거만한 귀족집 자제, 말없는 도서실 소년 등 캐릭터 컨셉들도 클리셰 그대로이며 거기에 분량까지 짧기 때문에 감정이입을 할 여지도 없이 금방 끝나버린다. 이후 검색해 보다 보니 처음에 만우절에 맞춰 적당히 캐릭터를 만들었다가, 나중에 정말로 그 게임을 완성해 버렸다는 것 같으니 초기에 이미지로 공개된 캐릭터들이 다소 클리셰적인 건 어쩔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최초에 공략 가능한 건 6마리지만 몇 개의 엔딩을 해금하다 보면 7월 7일 칠석날의 단자쿠에 선택지가 추가되며 7번째 남주인 앙헬 루트가 해금되고, 게임 시작과 동시에 "보통의 학원생활을 보낸다" / "약속을 다한다"라는 선택지가 추가되는데...

사실 난 엔딩을 절반쯤 모았을 무렵 그냥 이 게임 이쯤 하고 접을까도 생각했다. 볼륨도 얼마 없고, 캐릭터도 클리셰에 몇몇 엔딩에 반전이나 쇼크가 있긴 하지만 시나리오가 특별한 것도 아니며, 료타 루트를 제외하면 조류와 인간의 관계임을 의식하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이 "약속을 다한다"라는 선택지가 신경쓰이기도 했고, 스팀 업적 페이지에 BBL 에필로그 해금조건이 모든 14개 엔딩을 다 모으는 것이라고 표시된 되어 있는 만큼 일단 기계적으로 남은 엔딩들을 처리하고 "약속을 다한다"를 선택했다.



처음 얼마간은 통상 루트와 다를 바 없이 시작되지만 도중 어느 순간 주인공 히요코가 지각을 하게 되고, 이후 대부분 소꿉친구 료타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이 루트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소개하면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네타바레가 되기 때문에 삼갈 수 밖에 없지만 게임 내 세계관의 역사, 성 피죠네이션 학원의 설립배경, 후지시로 나게키에 대한 진상, 히요코와 료타가 성 피죠네이션에 입학한 이유 및 다른 등장조류들의 과거사 등이 미스테리물처럼 전개된다. 본편에도 제법 암울한 시나리오가 있긴 하지만 이쪽의 수위가 훨씬 높고, 분량면에서도 이 BBL루트가 나머지 본편 전체랑 맞먹을 정도의 장편 시나리오다. 완전히 별도의 게임이라 해도 좋을 레벨에, 스토리의 흡입력도 강하다. 불만을 제기하자면 도중에 선택지들이 나오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고 실제로 키네틱 노벨 수준이라는 정도. 아마 이 루트를 플레이했는가 여부에 따라 이 게임의 평가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하토풀 보이프렌드는 굳이 비둘기가 아니었더라도 충분히 호평받았을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호평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플레이한 사람들에게서 호평을 받았을 거라는 거고, 기업부터 동인, 상업용부터 무료까지 쏟아져 나오는 오토메 게임의 홍수 속에서 아마 쉽게 묻혀버렸을 테니까. 이런 괴상한 컨셉으로 오토메 게임 유저들은 물론 거기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호의적이든 아니든) 관심을 끌어내고 게임을 플레이하게 만든 건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 이후에 괴상한 상대와 연애하는 다른 패러디 게임들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게 두번 세번 먹히진 않잖아.

다만 통상루트와 BBL의 퀄리티 차가 크고, 단순히 비둘기를 보고 이게뭐얔ㅋㅋㅋㅋ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유저들을 붙잡아 게임을 끝가지 플레이하게 만들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미묘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획 레벨에서의 문제라고 생각되는 게, 아무리 진상 루트라고 해도, 이 BBL루트에 투입된 텍스트의 양이 다른 통상루트들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많은데다, 이 루트의 에필로그를 보기 위해서는 모든 통상루트를 클리어해야 하는 데 그 통상루트가 역으로 오마케 수준으로 느껴진다는 건 좀 아니잖아. 그러니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30분쯤 플레이하다가 이 게임을 그저 특이한 컨셉에 대충 장난으로 만든 게임이라고 단정지어도 할 말이 없을 테니까. 아니, 정말로. 누가 통상 엔딩 2~3개쯤 보고 너무 단조롭고 재미없다고 그만둔다고 해도 나로선 수긍할 수 밖에 없는 게, 진짜 재미있는 파트는 나중에 나오니까 3시간만 더 참고 해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재미있게 하긴 했지만 통상루트가 솔직히 대체로 단조롭기 때문에... 그걸 넘어간다면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실질적 본편에 들어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만큼 추천하긴 좀 미묘하다. 

다들 조류독감에는 주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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