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피카츄 현실도피


ポケットモンスター ピカチュウ / Pokémon Yellow Version: Special Pikachu Edition (1998 GB/1999 GBC)

일본판은 98년 GB, 해외판은 99년 GBC로 발매. 일본에서는 '포켓몬스터 피카츄'로, 해외에서는 '옐로우 버전 스페셜 피카츄 에디션'으로 발매되었으니 피카츄 버전이라 하든 옐로우 버전이라 하든 맞는 말이다.

게임 본편과는 별 관계 없는 이야기지만, 이 게임을 처음 시작한 건 아마 99년 정도의 일이다. 발매되고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판을 그대로 플레이했는데, 이 게임을 하다가 히라가나와 카타카나를 습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 내 친구들은 포켓몬을 시작하며 우르르 피카츄 버전을 택했는데, 다른 이유가 아니라 기존 레드/블루/그린의 스타팅 포켓몬 3마리를 전부 이벤트로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고 내가 피카츄 버전으로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만 이렇게 되면 뭐가 문제가 되는지 알 사람은 알 것이다. 이 머저리들이 전부 똑같은 버전을 골라버리면 아무도 도감을 완성할 수 없잖아.

다만 내 포켓몬 경력은 거기서 얼마 가지 않았다. 내가 시작했을 무렵에는 아직 한국에 본격적으로 상륙하기 전이었지만 이후 애니메이션이 방영되고 포켓몬 관련 상품이 넘쳐나기 시작하자 중2병이 돋아서 (실제로 중2였다) 포켓몬에 손을 떼고 드래곤 퀘스트 몬스터즈로 갈아탄 것이다. 드퀘몬도 재미있는 게임이었고, 결과적으로는 포켓몬보다는 드케몬에 쏟은 시간이 더 길어졌지만 실제로 포켓몬이든 드퀘몬이든 엔딩까지 진행하진 못했다. 어느 게임이든 수집과 도감등록을 위해 노가다만 하다가 지쳐 떨어졌다는 기억밖에 없다.

지금 생각하면 포켓몬스터는 시대를 앞서간 소셜게임이 아닐까. 그리고 소셜게임이든 MMO든, 이렇게 많은 유저들의 참여를 필요로 하는 게임들은 게임 자체의 질도 중요하지만 누가 먼저 시장을 선점하는가에 따라 승패가 갈리기 마련이다. 와우 유저들이 와우를 계속 하지 다른 와우클론들에 눈길도 주지 않는 건 자기 친구들이 여전히 와우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포켓몬도 마찬가지 아닐까. 96년 최초의 포켓몬스터 적/록이 출시된 이후 유사한 몬스터 콜렉팅 게임들이 등장했지만 내 친구들이 이미 포켓몬을 하고 있다면 나도 포켓몬을 하는 것이다. 나같은 중2병 찌질이들 일부를 제외하고 말야.

길거리에서 포켓몬 GO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포켓몬 GO를 시작할까 생각도 했지만 결국 미클리어 상태로 끝난 피카츄 버전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플레이 버전은 영문판이지만 아래 리뷰글에서는 전부 한국어 버전 명칭으로 치환해서 작성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UI는 조악/불편하고 모자란 점이 많다. 아이템의 보유한계는 빡빡하고, 그 아이템이 뭐에 쓰는지도 인게임 설명이 따로 없는데다, 포켓몬을 보관하는 것도 수량의 제한이 크게 다가오는데다 맵 시스템도 사용하기 불편하다. (도중에 1세대 리메이크인 리프그린을 30분 정도 만져보면 그 차이가 크게 느껴진다.) 다음 시나리오 포인트로 진행하는 데 필요한 힌트는 정말 최소한으로만 주어져 있기 때문에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막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새로운 기술을 습득해도 그 기술이 얼마나 효율적인지 어떤지를 알 수 없고, 포켓몬에게 새로운 기술을 가르쳐 주는 아이템인 기술머신도 일일이 선택해 부팅시켜 봐야 그 기술머신에 담긴 게 어떤 기술인지 알 수 있다.

어떤 포켓몬이 진화를 할 수 있는가, 있다면 어떤 조건에서 진화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정보도 일부 NPC들의 힌트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노힌트 상태에서 진행해야 한다. 레벨 5에서 포획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잉어킹을 레벨 20까지 고난의 세월을 거쳐 올리면 물속성 최고티어 중 하나인 갸라도스로 진화한다거나, 니도란 암/수의 최종진화에는 아이템 월석을 필요로 한다거나 하는 근 20년 전의 공략정보가 다소간이나마 머리에 남아있었던 덕분에 그나마 플레이가 가능했다고 해야 하나.

시나리오는 지극히 단순하다. 포켓몬 도감을 완성시키기 위해 칸토 지방을 돌면서 포켓몬을 수집, 육성하고 도중에 있는 포켓몬 도장 8곳을 돌며 도장깨기를 하다가 포켓몬 리그의 정점에 오르는 것. 최소한의 지도가 (사용이 불편하긴 하지만) 일단 존재한다 해도 갈 수 있는 곳을 다 가 보면서 진행하다가도 도중에 다소 막막해지기 쉬운 게, 탐사를 중심으로 한 오픈월드 같으면서도 선행 이벤트를 순서대로 클리어해야 다음 지역이 해금되는 시스템인 만큼 다음 이벤트 조건에 대한 힌트가 좀 더 충분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보라, 무지개, 연분홍 등 칸토 동부에서는 같은 곳을 몇 번이고 왕복해야 하는 백트래킹 요소가 있는 만큼 약간 혼란스럽다.

다른 RPG와 차별화되는 요소라면 역시 파티 편성의 자유도일텐데, 포켓몬간의 상성이 복잡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에 다양한 타입의 포켓몬들을 육성하며 중복되는 타입들을 점차 걸러내고 밸런스 잡힌 파티를 만들어 내는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덕분에 성인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었겠지만 주인공도 어린이고, 어린이 대상의 게임이라기엔 좀 어려운 감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생각해 보면 그걸 애니메이션이라는 신의 한 수로 해결한 게임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포켓몬의 상성이 그대로 게임에서도 적용되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시청이 곧 튜토리얼이 되는 것이다.



일례로 위의 지우와 웅의 첫 번째 배틀에서 보면 역상성인 피카츄의 전기공격이 롱스톤에게는 먹히지 않으며, 롱스톤의 조이기 공격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포켓몬의 교체가 불가능한 것을 보여준다. 재도전에서도 마찬가지로 고전하던 지우의 피카츄가 우연히 스프링쿨러를 터트리고, 거기서 바위 포켓몬은 물에 약하다는 힌트를 추가로 제공해 주게 된다. 물론 게임에서는 스프링쿨러를 터트리는 짓 따위는 할 수 없지만 말야. 애니메이션도 워낙 시리즈가 장기화되고, 새로운 게임에 맞춰 신 시리즈가 나오는 만큼 고증미스가 어딘가에서 발생하기도 했겠지만 전체적으로는 맞아떨어지니까.

결과적으로 애니메이션에서 얻은 힌트로 게임을 진행하고, 게임을 진행하는 힌트를 얻기 위해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는 선순환으로 유저들, 특히 아이들을 포켓몬이라는 수렁에 쳐넣는 것이다. 미디어 믹스의 모범적인 사례이자, 포켓몬 이후 등장한 다른 몬스터 콜렉션 게임들이 (일시적으로 바짝 따라오나 싶었던 디지몬을 제외하고) 하나같이 실패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 복잡하고 깊이 있는 게임을 만드는 것과, 그걸 유저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니까.


갸라도스, 버터플, 피카츄, 리자돈, 이상해꽃, 프리저

어느정도 상성관계가 파악되기 시작하고, 주요 멤버가 모이기 시작하면 그 뒤로는 일사천리로 풀리며 레벨 노가다가 심하게 요구되지 않는다는 건 장점이라고 할 만 하다. 싱글 플레이어로 스토리 모드를 클리어하는 것만 기준으로 한다면 말이지. 본격적인 대전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특정 포켓몬을 봉인한다거나 한 번이라도 기절한 포켓몬은 방생한다던가 하는 추가 규칙을 적용하는 야리코미에 들어가거나 한다면 또 문제는 달라진다. 플레이 타임 29시간 11분은 동시대의 다른 RPG들과 비교해도 특별히 긴 편이 아니기 때문에 가볍게 한 번 해보고 끝내는 캐쥬얼 유저와 하드코어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게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추천작이라는 건 아니다. 누구랑 같이 각잡고 1세대를 할 게 아니라면 이제와서 굳이 이걸 플레이할 필요는 없으니까. 1/2세대 포켓몬은 3세대로 전송도 되지 않을 뿐더러, 소셜 요소를 생각한다면 가능한 한 최신작을 집어서 유행에 따라가는 게 가장 현명할 테니 말이다. 게임이 끝난 뒤에도 플레이 자체는 가능하지만 같이 플레이해 줄 상대가 없다면 (혹은 혼자서도 잘해요로 머신 2개를 동원할 게 아니라면) 도감 완성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고 말이지.


핑백

  • Ура! : 포켓몬스터 크리스탈 버전 2016-08-29 08:24:03 #

    ... 타팅 포켓몬으로 브케인을 고르고, 별 생각없이 게임을 진행하다가, 캐터피와 잉어킹을 얻고 바로 진화형인 버터플과 갸라도스를 고정멤버로 넣을... 뻔 했으나, 지난 피카츄 버전에서도 그렇게 했던 걸 생각하고 겹치지 않는 멤버로 가기로 했다. 기왕 게임을 할 거라면 재미있게 해야지. 처음 보는 포켓몬과 익숙한 포켓몬들이 섞여서 나오 ... more

덧글

  • Admiral 2016/08/24 02:51 # 삭제 답글

    생각해보면 확실히 교환(버전간 차등을 둔다거나 교환을 통한 진화라던가)요소라던가 배포포켓몬의 존재도 있고, 2세대 및 4세대에 포켓워커라고 요즘 포켓몬GO의 전신으로 걸어다니면서 아이템이나 희귀포켓몬 얻을 수도 있었다는게 떠오르네요. 6세대에서는 사파리존마저 친구코드가 많아야 다양한 종을 얻을 수 있다고는 하니. ;;;
    1세대 플레이할 이유가 없다는 말에, 올해 말에 나온다는 7세대 신버전은 1세대에서 포켓몬을 포켓몬뱅크란 시스템을 통해 가지고 올 수 있다는 소식이 떠오르네요.

    뭐, 전 포켓몬 관련 정보는 보기야 하지만, 개체치라던가 노력치, 성격, 알까기...
    이런건 성미에 안 맞더군요... 칸코레도 접은 이유가 이런거랄까...
  • Катюша 2016/08/24 03:25 #

    제가 점차적으로 흥미를 잃었던 것도 그런 노가다 요소가 점점 늘어난 덕분인데,
    대전 중심으로 할 게 아니라 캐쥬얼하게 할 거라면 굳이 그런거 신경쓸 필요 없다고도 하네요.

    구닥다리 GB로부터 어떻게 전송시킬지, 어떻게 1세대 데이터를 적용시킬지 시스템적으로는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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