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크리스탈 버전 현실도피


ポケットモンスター クリスタルバージョン / Pokémon Crystal Version (2000 GBC)

별 재미없는 옛날 이야기부터 시작할까. 지난 피카츄 버전 포스팅에서도 언급했지만 1세대 포켓몬스터를 열심히 하다가, 드래곤 퀘스트 몬스터즈로 넘어갔던 나지만 2세대 포켓몬스터의 발매예고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포켓몬의 수가 250종으로 늘어난다던가, 새로운 스타팅 포켓몬이 주어진다거나 하는 정보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기대도 올라갔고, 발매를 기다리던 소프트 중 하나였으나...

정작 발매될 무렵에는 일가족 이민을 떠나게 된 덕분에 그 혼란의 카오스가 진정될 무렵에는 이미 포켓몬이 3세대를 돌파하고 있었고, 151도 중노동인데 점점 늘어가는 포켓몬의 수,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노가다판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질려버린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3세대 이후의 포켓몬은 어쨌건 전송이 되는 만큼 차세대 포켓몬이 나올 때마다 추가분만 입수하는 것만으로도 전국도감 유지가 가능할... 것 같긴 한데. 어쨌건 추억의 소프트라고 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애매한 게임이다. 20세기 카운트다운을 맞을 무렵 이 게임을 기다리던 중딩이 나이를 두배를 쳐먹고 이제야 플레이했다. 이하 인명, 지명, 포켓몬명 등은 전부 한칭으로 통일했다.




크리스탈은 2세대 금/은의 개량판으로, 시리즈 최초로 여주인공이 등장한 역사적인(?) 버전이다. 스타팅 포켓몬으로 브케인을 고르고, 별 생각없이 게임을 진행하다가, 캐터피와 잉어킹을 얻고 바로 진화형인 버터플과 갸라도스를 고정멤버로 넣을... 뻔 했으나, 지난 피카츄 버전에서도 그렇게 했던 걸 생각하고 겹치지 않는 멤버로 가기로 했다. 기왕 게임을 할 거라면 재미있게 해야지.

처음 보는 포켓몬과 익숙한 포켓몬들이 섞여서 나오는 만큼 적응은 그리 어렵지 않고, 기본 시스템은 동일하나 아이템 인벤토리의 사용이 크게 개선되어 사용이 편해졌다. 각 포켓몬들이 가진 기술들을 확인하는 것도 쉽고, 기술머신을 일일이 켜보거나 인터넷에서 목록을 확인할 필요 없이 열람할 수 있다. 키 이벤트 아이템들과 소비성 아이템들이 별도 카테고리로 분류된 덕분에 아이템창 스크롤의 필요성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 외에도 시간을 입력해 낮과 밤에 따라 출몰 포켓몬이 달라지고 요일에 따라 특정 이벤트가 발생하는 시스템이나 알 포켓몬의 등장, 친밀도에 따른 진화 등 새로운 시스템이 많이 추가되었으며, 1세대에서 "SPECIAL"이라는 수치로 특수공격/특수방어가 통합되어 있던 것이 별도의 수치로 분리되는 등 내부적인 개선도 많이 이루어졌다. 강철과 악 타입의 추가로 추가 밸런스 조정이 이루어졌다고도 하는데, 적어도 스토리 모드에서는 떨구기 곤란한 적들이 늘어났다는 정도 외에는 의미가 없었다. 너프되었다고는 하지만 에스퍼는 여전히 상대하기 힘들고, 강철이나 악 타입은 그저 어거지로 밀어붙이면서 무너트려야 했다. (기본적으로 공략을 보지 않는 성격이라 괜한 고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첫인상은 매우 좋았지만, 게임 전체의 페이싱에 대해서는 그리 좋은 평을 할 수 없다.

8명의 체육관 관장을 전부 깨고, 사천왕을 넘어 현 챔피언을 쓰러트리고 포켓몬 리그의 정점에 올라선다는 스토리 자체는 동일한데, 문제는 3번째 관장 꼭두부터 발생한다. 각각 비행, 벌레 타입을 쓰는 첫 두 관장은 (당신이 치코리타를 고르지 않은 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데, 꼭두는 노멀타입이기 때문에 약점을 찌르기도 쉽지 않고, 평범하게 금빛시티에 다다라 꼭두를 만나러 가면 레벨 20 밀탱크에 파티가 전멸당하는 꼴을 보기 십상이다.

피카츄 버전과 비교하자면, 스타팅 포켓몬인 피카츄는 첫 번째 체육관 관장인 웅이 지면/바위 타입을 쓰는 덕분에 씨알도 안 먹히지만 그 직전에 버터플로 빠르게 진화시킬 수 있는 캐터피나, 웅의 약점을 찌를 수 있는 격투 타입 성원숭을 입수할 수 있게 배치해 두는 구제조치가 마련되어 있는데 비해 꼭두는 노멀 타입이라 별다른 약점이 없다는 게 문제다. 오는 길에 노멀타입 공격에 면역인 고스트 타입 포켓몬 고오스를 입수할 수 있지만, 정작 밀탱크의 구르기 공격은 바위타입이기 때문에 고오스에게도 통한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는 던전다운 던전도 없다시피 하고, 덕분에 레벨 노가다로 밀어붙이려고 해도 엄청난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나는 밀탱크와 동시에 발챙이를 내보내 수면기로 잠재우고, 그 사이에 물대포로 찔끔찔끔 데미지를 입히는 식으로 간신히 넘겼는데, 최면이 실패해서 밀탱크에 공격을 허용하면 그대로 깨지게 되니 리셋.

그렇게 꼭두를 제끼고 나면 나오는 인주시티의 유빈은 고스트 타입이다. 고오스 라인의 최종진화형인 팬텀을 들고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여기까지 오는 구간에도 야생 포켓몬들의 레벨이 워낙 낮아 레벨링을 할 만한 지역이 딱히 없는데다 고스트 타입 자체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타입이란 걸 생각하면 역시 골치아픈 상대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넘기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고스트 타입의 유빈, 격투 타입의 사도, 강철 타입의 규리를 상대하는데 각각 이들의 히든카드인 팬텀, 강챙이, 강철톤을 메타몽으로 복사해 맞불놓는 전략으로 간신히 넘길 수 있었다. 메타몽은 1세대에서는 굉장히 레어했는데, 여기서는 어째 가는 길에 나오길래 잡아서 조커로 쓸 수 있는 포켓몬. 턴을 1턴 소비해야 하긴 하지만 상대 포켓몬의 능력을 카피해 그대로 돌려줄 수 있는, 트릭키하지만 쓰기에 따라서는 사기적인 유틸성을 보여준다. 그나마 이쯤 오면 수로를 오가면서 왕눈해/독파리를 잡으며 레벨 노가다가 가능해지고, 그 이후 방문하게 되는 황토마을과 그 너머부터는 야생 포켓몬들의 레벨도 적절히 오르게 된다.

마지막 배지를 손에 넣고, 사천왕까지 가는 길에서는 강력한 트레이너들이 출현하긴 하지만 정작 길 자체는 간단하다. 1세대에서 환장하게 햇갈리는 던전에 전설의 포켓몬 선더까지 배치되어 있던 걸 생각하면. 사천왕전은 물론 챔피언인 목호마저도 어이없이 무너진다. 1세대에서 56~62레벨대의 포켓몬을 갖고 등장하던 목호가, 2세대에서는 사천왕에서 챔피언으로 승급했음에도 불구하고 44~50레벨의 포켓몬으로 오히려 약화되어 있다. 1세대를 생각하고 준비해서 간다면 매우 허무하게 무너지는 셈.

레어코일, 메타몽, 블레이범, 골덕, 독파리, 꼬지모

목호를 쓰러트리고 나면 최종전에 참가한 포켓몬들이 전당에 등록되며 엔딩 크레딧이 나오고... 1세대의 배경무대인 관동지방이 개방된다. 듣기로는 개발자들이 이 때까지만 해도 포켓몬이 이렇게 롱런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고, 이 게임으로 끝날 거라는 생각에 대막을 장식하기 위해 관동을 억지로 추가했을 거라고 하는데, 그럴듯 한 이야기다. 물론 많은 지역들이 생략되어 있고, 던전다운 던전도 없는데다 마을들은 다닥다닥 붙어있어 많이 좁아졌다는 인상을 받긴 하지만 카트리지의 한계라고 생각하면 그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후 관동의 도장 8곳을 추가로 돌며 도장깨기를 계속하게 되는데...

게임 흐름상으로 생각하면 챔피언 목호보다 이 관장들이 더 후반에 등장하는 상대인 만큼 더 강력해야 마땅하겠지만, 그러면 각 마을 관장들이 챔피언보다 강하다는 어색한 상황이 나오는 만큼 어쩔 수 없이 관장들을 목호보다 강하지 않은 선에서 조절시킨 것 같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관동지방의 필드에 등장하는 야생 포켓몬마저 약하게 설정된 덕분에 게임 마지막 에리어인 은빛산까지 가기 전까지 거의 레벨링이 진행되지 않는다.

추가로 본래 성도지방 한정이어야 할 2세대 포켓몬들이 필드에서 출현하는 걸 보면 어색함을 느낀다. 1세대 포켓몬이 성도에 등장하는 건 원래 두 지방에 걸쳐 분포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고작 3년 전까지 관동에 없었던 2세대 포켓몬이 관동에, 그것도 트레이너가 보유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필드에 등장하면 '원래 있었다'고 하기도 힘들지 않을까.

밸런스 이야기로 돌아와서, 관동의 마지막 관장이자, 전작의 라이벌인 그린이 56~58레벨 포켓몬을 사용하는 데 비해, 그 이후 상대해야 하는 진 최종보스 레드는 73~81레벨, 거의 20레벨 이상 높은 포켓몬을 사용한다. 결과적으로 기껏 추가한 관동지역을 돌면서 제2부가 시작되는 게 아니라, 전작의 관장들을 하나하나 순삭양민학살하며 뱃지를 털고는 은빛산에 쳐박혀 몇 시간이고 레벨 노가다만 해야 하는 것이다. 피카츄 버전은 평범하게 1배속으로 플레이했지만, 크리스탈은 상당부분을 결국 (스샷 찍어가면서 포스팅하는데 뭐 숨길 것도 없다) 에뮬레이터의 터보 기능을 동원해 3배속으로 플레이했다. 그러지 않았으면 정말 하다가 미쳐버렸을 것이다.

일본 발매일 기준으로 포켓몬스터 적/록이 96년, 피카츄가 98년, 2세대인 금/은이 99년에 발매되었다. 그래픽이나 시스템을 일신하고, 새로운 포켓몬들의 디자인이나 특성도 재미있고, 타입간 밸런스를 조정한 등 발전도 많았지만 정작 테스트플레이를 뉴게임부터 끝까지 해보긴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페이싱 조절이다.


포켓몬에 빠져 가족도 버리고 은둔해 버린 인간말종
클리어 멤버는 위에서부터 잠만보/레어코일/골덕/블레이범/망나뇽/독파리

마지막 레드는 엄청나게 까다로운 상대다. 레벨 81 피카츄를 상대로 땅 포켓몬을 데려다 지진이라도 쓰고 싶지만, 내가 공략을 보지 않고 적당히 플레이한 덕분에 지진을 습득할 수 있는 기술머신이 없었다. (어딘가에서 놓쳤을 것이다) 이제 와서 지면 타입 포켓몬을 처음부터 육성하는 것도 가능은 하겠지만 누굴 키워야 할 지도 모르고 검색질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대신 관동에서 심볼 인카운터로 등장하는 잠만보맹독을 가르친 뒤 탱킹하는 걸로 피카츄를 독살했다. 에브이, 이상해꽃, 리자돈, 거북왕은 그나마 대처가 가능한 상대들이지만 가장 골치아픈 건 레벨 75의 잠만보.

잠만보는 그 자체로도 튼튼한데다 기술 '기억상실'로 특수방어력을 스스로 버프하며, 공격력도 막강하고, 좀 데미지를 입혔다 싶으면 알아서 잠들어버리며 모든 상태이상과 HP를 회복하는 괴물인데다 잠자는 도중에도 공격을 가하는 놈이다. 심볼 인카운터의 레벨 50 잠만보와 달리 레벨이 이정도까지 높아지면 어중간하게는 씨도 안 먹히는데, 내가 사용한 전략은 단순하다. 레벨 55 망나뇽이라면 잠만보의 구르기 공격을 1~2번 정도는 버텨낼 수 있다. 굳이 공격을 할 게 아니라, 대량의 포션을 준비하고 무한 회복을 해 가며 상대 잠만보의 스킬이 바닥나 아무런 공격도 할 수 없게 될 때까지 버틴 뒤 더 쓸 기술이 없어 '기억상실'만 반복하는 잠만보를 상대로 노멀타입 공격을 계속 가해 끝장냈다. (알고 지내는 포덕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LOL 이라는 대답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런 저레벨로 잘도 깼다는 칭찬아닌 칭찬이...)

어쨌건, 전작의 주인공이 최종보스로 등장한다는 건 확실히 불타오르는 전개였다. 다만, 이게 마지막 포켓몬 게임이 될 거라고 기획했다는 이야기를 같이 염두에 둔다면 이 레드의 캐릭터에 씁쓸한 부분이 남는다.

그는 챔피언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켓몬 리그에 있는 것도 아니고, 라이벌처럼 어딘가의 관장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태초마을의 레드의 집에 들어가 보면 전화도 없고 아무런 연락도 않는 그를 걱정하는 어머니가 있고, 그는 오박사에 따르면 너무 위험한 야생 포켓몬이 출몰하는 덕분에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된 장소라는 은빛산에 홀로 틀어박혀 있다. 마치 세상과 인연을 끊은 듯, 심지어 그가 등장할 때의 호칭도 '챔피언 레드'가 아니라 단지 '포켓몬 트레이너 레드'이다. 게다가 그의 유일한 대사는 ...... 뿐이고, 전투에서 승리하면 유령처럼 사라진다. 대체 이 챔피언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물론 무슨 희귀한 포켓몬을 찾으러 왔다던가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은빛산에만 등장하는 무우마직같은 레어 포켓몬도 있고 말야. 하지만 부모와의 연락조차 끊어버리고 산에 쳐박혔다는 건 단순한 수행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레드의 라이벌인 그린의 집에 가면 누나가 그린이 너무 싸돌아다닌다고 하면서도 걱정하는 기색은 없는 걸 보면 적어도 이놈은 집과 연을 끊은 막장인간은 아닌 데다, 체육관 관장으로서 사회적인 활동도 여전히 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이 레드는 포켓몬에 빠져서 일상을 등한시한 포덕을 상징하는 존재가 아닐까. 무엇보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고, 아무 말 없이 배틀에 들어가지만 즐거워 보이지도 않고 말이지. 주말을 꼬박 바쳐 라스트 스퍼트를 넣고 일요일 23시에 저 레드를 보면 기분이 더 미묘하다

덧글

  • Admiral 2016/08/30 04:54 # 삭제 답글

    제작진은 꼭두전에 대비하여 하나 넣어놨습니다. 바로 암컷 알통몬.

    전 2세대 접할 무렵에 포케스페를 접했던지라 작중에서 사라진 비주기를 대신해서 상록체육관 관장이 되겠다는 레드를 보고 난 이후에 게임 플레이하면서 "왜 체육관장은 그린이 하고 있고 넌 여기 쳐박혀있냐?"고 생각했었지요.

    그나저나 크리스탈 여주인공이 귀여웠기에 4세대 리메이크에서 나름 기대했었는데, 여주인공 보고 실망했었지요. (...) 아, 그나저나 2세대에서 특공/특방 나뉘었다는 말에 부스터 유일왕 전설이 생각나네요. (...)
  • Катюша 2016/08/30 09:17 #

    ...! 말씀 듣고 급히 확인했습니다. 플레이 끝나고 나서 포스팅 작성하며 검색하다가 놓쳤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4세대 이후를 하기 위해 DS 중고나 3DS를 장만할지 요즘 땡기고 있습니다. 그놈의 지역제한만 아니면 진작에 장만했겠지만... (EU한정 기기따위)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