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메트리 워즈, 템페스트, 블랙 위도우 현실도피


Geometry Wars: Retro Evolved (X360 2005, PC 2007)

Bizarre Creations에서 제작한 트윈스틱 슈터. 스크린샷의 화질이 심하게 나쁜 건 도저히 플레이 도중에 스크린샷을 찍을 여유가 없어 적당히 녹화했다가 캡쳐했더니 저 모양이 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본래 프로젝트 고담이라는 레이싱 게임의 오마케 게임으로 수록되어 있던 것이 인기를 얻어 별도 타이틀로 발매되고 이후 확장시킨 후속작들도 계속 발매되는 지오메트리 워즈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트윈스틱 슈터, 즉 좌측 아날로그 스틱으로 자기(自機)를 움직이고, 오른쪽 스틱으로 공격 방향을 결정해 360도 전방면 공격이 가능. 거기에 RT나 LT 중 하나로 봄을 소비해 위기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다. PC판은 키보드의 WASD와 십자키, 혹은 키보드+마우스로도 조작이 가능하지만 아무래도 게임 디자인상 패드가 가장 편하다.

게임을 시작하면 사각형의 공간 속에서 처음엔 한두마리씩 적들이 스폰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작 5분이 채 지나지 않는 사이에 대처가 힘들어질 만큼 적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하고, 어지간히 손에 익은 뒤에도 플레이 타임이 한 번에 10분을 넘기기 힘든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게임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각 적들의 알고리즘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며 대처법을 조금씩 습득하면서 자신의 스코어를 갱신하면서 조금씩 진전을 보이게 되고, 일정 스코어 포인트마다 무기가 업그레이드되거나, 잔기나 봄을 습득하는 등의 조치가 주어지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클리어가 불가능한 게임이기도 하다. 플레이어의 능력에 따라 꽤 오래 싸울 수는 있을 지 몰라도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다.

빠른 판단력과 반사신경만이 아니라 각 적들에 대한 대처법을 궁리하기도 해야 하는, 다소간의 전략적인 사고방식을 요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블랙홀처럼 보이는 검은 원형의 적들은 가까이 다가오는 다른 적들을 흡수하기도 하는데, 자코의 대량 스폰과 맞물릴 때는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너무 방치하다가는 알아서 터지며 이동속도가 빠른 작은 적들을 대량 내뱉기 때문에 봄 1개를 각오하고 놔둘 것인가, 아니면 속공으로 미리 터트려버릴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식이다.

제목의 "Retro Evolved"는 정말 말 그대로의 제목이다. 레트로 게임의 모방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레트로의 진화형태라는 점에서 그런데, 단지 픽셀 그래픽의 저예산 게임일 뿐인 것을 "레트로풍"이라고 내세우는 스팀의 많은 인디 게임들과는 다른 방향의 레트로풍을 보여준다. 레트로 게임들의 게임플레이 스타일를 채용하되, 그래픽과 사운드 연출면에서는 70년대 말 초기 아케이드 게임들의 벡터 그래픽에서 모티브를 따오면서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최대한 화려하게 포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김에, 그 모티브가 되었을 거라고 내 멋대로 추정하는 게임 2가지를 같이 소개.



Tempest (Arcade 1981)

스팀의 Atari Vault 콜렉션에 수록된 버전이다. 1978년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슈팅이라는 장르의 막을 연 이후 파쿠리 게임들이 만들어지는 와중에도 아타리는 그 틀을 계속 깨려는 시도를 해왔는데, 스페이스 인베이더 직후 79년에 낸 게임이 그 게임성을 180도 뒤엎은 아스테로이드라는 데서도 당시 아타리의 패기를 느낄 수 있다. 뭐, 아스테로이드 이야기는 언젠가 다시 할 일이 있을 테지만.

스페이스 인베이더 이후 한때를 풍미한 고정화면식 슈팅게임으로 지금까지 가장 이름이 높은 건 남코의 갤러가가 아닐까 싶지만, 내가 그런 고정화면 슈팅으로 가장 높게 평가하는 건 이 게임, 템페스트이다.

밝고, 현란하며 동시에 픽셀이 눈에 띄지 않는 벡터 그래픽. 그리고 화면 하단만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360도 회전하는 원통형으로 디자인된 스테이지에서 차례로 등장하는 적들을 격파하고, 적들의 공격을 피하는 게임플레이. 360도 회전이 요구되는 대신 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적들이 직선으로 이어진 레인 위에 존재하고, 이를 통해 가늠해서 멀리 떨어진 적을 공격할 수 있다. 첫 스테이지는 단순한 원통이지만 스테이지별로 레이아웃이 계속해서 달라지기도 한다.

봄이 채용된 초기 게임이기도 하다. 스테이지를 지나가는 도중에 Superzapper Recharge라는 메시지가 뜨는데, 이 슈퍼재퍼가 곧 봄. 적절한 타이밍에 사용하면 화면상의 적을 소거한다. 즉 리필은 자주 해 주지만 한 스테이지 내에서는 한 번 밖에 사용할 수 없다.

굳이 단점이라면 자기가 화면 위쪽에 있을 때는 좌우가 뒤집혀 버리는 덕분에 익숙해지기 전에는 살짝 혼란스러울 수도 있기는 하지만, 게임으로서의 템포가 빠르고 무엇보다 연출이 화려하다. 픽셀 스프라이트로서는 당시대에 도저히 불가능할 확대와 축소를 자유자재로 구현하는 벡터 그래픽의 특징을 적극 활용한 게임이기도 하다. 사실 아타리는 이 시기에 벡터 그래픽으로 지금으로 치면 플라이트 슈팅이나 FPS스런 것들도 내놓고 있었지만...

템페스트를 비롯한 당시 아타리의 아케이드 명작들은 그 벡터 그래픽이 오히려 족쇄가 되어 가정용으로 이식되지 않았다. 아, 물론 시도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아래 스크린샷은 같은 Atari Vault 콜렉션에 포함된, 템페스트의 아타리 2600 이식용으로 개발되다가 미발매된 프로토타입이다.

프로그래머의 장난기를 느끼게 하는 2600판 스테이지 1

왜 스테이지 1 디자인이 팬티 모양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래 벡터 그래픽이던 것을 무리해서 저해상도 비트맵에 때려박으니 플레이가 불가능한 수준이다. 당연히 원근감은 느껴지지 않는데다 처음엔 적의 사선에 내가 들어왔는지, 어느 위치에서 쏴야 적을 맞출 수 있는지를 가늠하기도 쉽지 않을 정도, 거기에 탄속도 미묘하게 빠른 느낌을 받는다. 뭐, 그러니 미발매로 끝났겠지. 적어도 이 무렵까지는 만들다 만 프로토타입을 생각없이 발매하는 회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실 템페스트의 아케이드 원작은 2600이 아니라 패미컴을 데려와도 이식이 안 될 게임이다.

아타리는 이후 비운의 하드 아타리 재규어용으로 템페스트 2000을 발매하는데, 템페스트 2000은 만약 퍼스트 파티 게임이 아니라 동세대 다른 게임기로 등장했다면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작 반열에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임이다. 아케이드용 템페스트는 사실 아케이드답게 너무 어려운 면도 있는데, 템페스트 2000은 그래픽과 사운드를 보강하기만 한 게 아니라 게임 밸런스도 가정용에 맞게 적절히 조정된 명작이다. 하드를 잘못 만나서 그렇지.

지오메트리 워즈로 이야기를 돌리자면, 갈고리 모양의 플레이어 기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템페스트에 대한 리스펙트라고 생각한다. 스테이지 레이아웃이나 플레이스타일은 전혀 다르지만, 네온사인을 연상시키는 그래픽 스타일이나 일부 적의 디자인에서도 템페스트의 영향이 느껴진다.



Black Widow (Arcade 1982)

두번째는 그 이듬해 발매된 블랙 위도우. 역시 스팀의 Atari Vault에 수록된 버전이다. 자기는 거미, 2개의 8방향 스틱을 채용, 좌측 스틱으로 이동하고 우측 스틱으로 공격할 방향을 결정하는 트윈스틱 슈터이다. 위 스크린샷의 캐비넷 이미지에는 어째선지 조이스틱이 보이지 않지만. PC판에서 X360 패드의 기본 매핑은 스틱이 아니라 방향키와 ABXY로 되어 있지만 옵션에서 이동과 공격을 아날로그 스틱에 매핑하는 게 가능하다. (내가 그 세대가 아니니까) 검색질로 게임의 역사를 파고 들어가자면 타이토의 스페이스 던젼(1981)이나 윌리엄즈의 로보트론 2084(1982)와 같은 게임들이 먼저 나오기는 했다만 블랙 위도우도 충분히 초기의 물건이다.

재미있게도, 이 게임에서는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것이 적은 아니다. 가만히 놔두다 보면 다른 적들을 알아서 잡아먹는 무지개색 벌레가 있는데, 자기의 화력으로는 쓰러트릴 수 없는 적들을 플레이어 대신 제거해 주는 고마운 존재이지만, 점수 아이템을 먹어버리거나, 죽일 수 있는 적을을 제거해 점수 누적을 방해하는 얄미운 존재이기도 하다. 이 게임도 점수에 따라 잔기가 늘어나는 식이기 때문에 너무 여기에 의존하다 보면 중반부 이후를 견디기 힘들어진다.

종종 그물 위에 알을 까는 적들도 있는데, 이 알들은 샷으로는 파괴할 수 없지만 밀어서 그물 밖으로 던져버릴 수는 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깨어나 적이 되는데, 그렇게 깨어나는 적들 중 일부는 무적판정인지 샷으로 쏴도 밀려나기만 할 뿐 죽지 않기 때문에 여유가 있다면 이것들을 미리 밀어내는 것도 필요하다. 거미와 곤충을 모티브로 한 게임다운 재미있는 요소다.

스테이지의 레이아웃은 같은 거미집 모양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그 안에도 배리에이션이 존재한다. 붉은 색으로 표시된 선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건너갈 수는 있지만, 그 반대로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다. 웨이브가 진행됨에 따라 동선까지 신경써야 하는 것이다.

난이도는 물론 흉악하고, 이 시절 아케이드 게임답게 처음엔 플레이 타임 5분을 넘기기가 힘든 수준이지만 Atari Vault에 수록된 게임들 중에서 내가 가장 많이 플레이하는 게임이기도 하다. 단순해 보이는 외견 속에 꽤 깊이있는 플레이 요소를 갖춘 게임이기도 하니까. 특정 스테이지에서는 적들이 갤러가의 편대처럼 날아들고, 전부 격추하면 보너스 점수를 주는 등 타사 게임들에서 빌려온 요소들도 보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2가지 요소들로 분명한 자기색을 갖춘 게임이다.

그런데 블랙 위도우는 아타리 아케이드 중에서도 인지도가 낮은 편인데, 관련 정보를 검색해 보다 보니 그 이유를 알 법 하다. 이 게임은 Gravitar라는, 잘 팔리지 않은 게임의 컨버전 키트로 발매되어다고 하는데 그렇잖아도 안 팔린 게임의 컨버전 키트라면 더더욱 물량이 적을 수 밖에 없지. (그렇다고 그라비타가 쿠소게란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깨끗한 샷이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구글 이미지 검색

이건 뭐 아타리 이야기를 하기 위해 지오메트리 워즈를 꺼낸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사실 그렇다 예의상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지오메트리 워즈의 레트로스러움은 그래픽이 아니라 플레이에 있다. 듀얼 아날로그 스틱 게임패드가 대중화되기 전까지는 잊혀진 장르일 수 밖에 없던 장르를 재발견해 현대적으로 포장한 것 만이 아니라, 플레이의 템포 면에서도 내 실력으로는 지오메트리 워즈, 템페스트, 블랙 위도우의 게임오버까지의 플레이 타임이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짧다. 난이도도 비슷한 수준이란 이야기. 반복해 플레이하며 조금씩 자기기록을 갱신하는 재미로 하는 것이면서, 그걸 질리지 않게 해 주는 정신없이 바쁜 게임플레이가 장점.

사실 게임적으로는 워낙 단순해 리뷰를 쓸 생각도 않고 있다가 (네타가 떠올라야 쓰지) 단순히 저예산 픽셀 그래픽이란 것 외에 레트로적인 요소가 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레트로 태그가 달려 있는 스팀 인디 게임들을 보다가 떠올라서 휘갈겨 보았다. 한두해도 아니고, 이젠 '레트로 스타일'이라는 게 변명처럼 쓰이는 것 같단 말이지. 사견이지만, 이런 5분 정도의 세션 타임은 지금 기준에선 PC나 거치기보다 모바일에 딱 맞는 템포인데, 이 시기의 아케이드나 아타리 2600 게임들 대부분이 거기에 부합되는 만큼 연구해 봐도 좋을 것 같은데 말이지... 손가락이 화면을 가린다는 터치스크린의 본질적 문제만 어떻게 할 수 있다면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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